이흥렬(55) 작가는 나무 사진가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잡지 ‘객석’에서 사진기자로 1년, 스튜디오 상업사진가로 3년 일하고 스물아홉 살에 이탈리아로 사진 유학을 떠난 후부터는 줄곧 ‘나무’에 집중해 왔다.
원래 나무를 좋아했던 것도 이유지만 사실 그에게는 나무와 얽힌 특별한 계기들이 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려면 꼭 지나쳐야 했던 마을 어귀 서낭당 신목(神木)과의 인연이다.
“서낭당 앞에는 늘 마을 사람들이 갖다 놓은 음식과 누군지 모르는 할머니 그림, 그리고 돈이 놓여 있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 그 돈을 훔쳐서 과자를 사 먹은 적이 있어요. 어린 마음에도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서낭당을 지날 때마다 가슴을 졸였죠.”
비 오는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가던 어린 이흥렬은 너무 무서워 서낭당 앞에서 발길이 얼어붙었고 한참 비를 맞은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 큰 고목을 보면 늙은 여인의 얼굴이 중첩됐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집 앞 공원에 있던 큰 고목이 어린 시절 서낭당 신목과 비슷해서 사진을 찍고, 지인이 소개해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늘 검은색이나 보라색 옷을 입고 같은 색의 화장을 하고 다니던)의 이탈리아 여인을 찍어서 나무 사진과 얼굴을 합성한 작품을 완성했죠. 그 이후부터는 다시 고목을 봐도 늙은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나름대로 어린 시절의 무서운 기억에서 자유로워진 거예요.”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후, 신기하게도 나무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서울 강남 양재천 주변에 작업실을 구했는데, 어느 날 양재천 주변의 아름드리나무들에 숫자를 쓴 빨간 리본이 묶이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를 위해 도로를 내면서 나무 500여 그루가 잘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아름다운 나무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던 이 작가는 서초구청 도로교통과에 시뮬레이션을 요청했다.
“이 나무들을 잘라내고 간선도로를 내면 도로 사정이 원활해지는지를 물었는데,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아지지 않는다’로 나왔어요.”
이후 이 작가는 직접 시민대표가 돼서 주민 3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시와 서초구, SH서울주택도시공사에 진정서를 냈다. 결국 도로는 이 작가를 비롯한 시민들의 힘으로 양재시민의숲 터널 아래를 지나도록 계획이 변경됐다. 이 작가는 이때 양재천 주변 나무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2013년 5월 ‘푸른 나무’ 시리즈 전시를 열었다. 그가 나무만을 찍어서 열었던 첫 번째 전시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나무 사진가가 됐고 ‘꿈꾸는 나무’, ‘아트 나무’, ‘숲’ 시리즈의 전시를 개최했다.
전국을 돌며 다양한 나무를 찍던 이 작가는 네팔, 이탈리아, 마다가스카르까지 날아가 우리에게는 낯선 신비로운 나무들도 찍게 됐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게 이탈리아의 올리브나무와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전시를 열었던 게 인연이 돼서 2018년 폴리아주 바리시에서 요청이 왔어요.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찍고 전시까지 열어달라는 내용이었죠.”
이탈리아반도 뒤꿈치에 해당하는 폴리아주는 이탈리아 내 올리브오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는 지역이다. 한국의 전라도만 한 크기의 땅이 온통 올리브나무로 뒤덮여 있다.
“올리브나무는 부드러운 기름을 주지만 나무 자체는 돌 같아요. 수령이 몇백, 몇천 년이 된 올리브나무는 화석처럼 단단하죠. 그래도 여전히 올리브 열매를 맺죠. 딱딱한 몸을 비틀어서 고통을 쥐어짜듯 향기롭고 부드러운 오일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실 이흥렬 작가의 나무 사진은 다른 나무 사진과는 다른 특별한 차별점이 있다. ‘숲’ 시리즈만 빼고 모두 밤에 찍은 사진들이다. 그것도 나무 뒤에 조명을 설치해 오롯이 나무만을 빛나게 한다.
“나무를 인간의 동반자이자 지구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무대 위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조명을 비춰서 나무를 돋보이게 하는 사진을 찍고 있죠.”
조명의 세기가 충분하진 않지만 조명기와 카메라 렌즈에 필터를 키우고, 노출 시간을 조절하면 나무를 둘러싼 주변 풍경을 원하는 대로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별빛의 움직임이다. 때로는 보석이 박힌 것처럼 알알이 선명한 별을, 때로는 길게 꼬리를 그리며 움직이는 별을 나무 주변에 담아두는데, 지난해 11월 촬영한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 시리즈는 더 드라마틱하다. 『어린 왕자』의 작은 행성에 홀로 서 있는 그 바오바브나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바오바브나무를 직접 가서 보니 동화를 넘어 신화적인 존재로 느껴지더군요. 제대로 자라면 30m 이상 자란다니까 지상의 어떤 나무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죠. 신이 있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이 바오바브나무만 보이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귀국 후 전시 제목도 ‘신들이 사랑한 나무 바오밥’으로 정했죠.”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1박 2일,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해서 다시 트럭을 타고 1박 2일. 그렇게 4일을 가야 볼 수 있는 바오바브나무와의 만남은 신비로운 충격으로 남았다.
“마다가스카르는 60년 전까지 프랑스령이었어요. 이건 추측이지만 아마도 『어린 왕자』를 쓴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생전에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를 본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어린 왕자의 작은 행성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나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거죠.”
올해는 이 작가에게 또 다른 한 해가 될 것 같다. 해외 촬영을 기획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계획이 스톱되면서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친구로 알게 된 ‘섬 연구소장’ 강재윤 시인이 “외국 나무만 찍지 말고 한국의 섬 나무들도 찍어보시라”며 자신의 책 『신안』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전남 신안군에는 1000개가 넘는 섬이 있다고 한다.
“새로운 나무 사진을 찍을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고립된 지역에서 개발의 때를 타지 않은 섬 나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끈끈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그가 나무를 찍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무가 팽나무인 것도 같은 이유다.
“제주도와 남부 지방에 가면 마을마다 팽나무가 참 많아요. 흔히 ‘정자목’이라고들 하죠. 생김도 역동적이고 예쁘지만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과 오랜 세월 친숙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쌓아온 나무들이니까요.”
이흥렬 작가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바로 ‘예술의 숲’을 만드는 것이다. 브라질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스토리를 알게 되면서 목표가 된 꿈이다. 전쟁과 기아를 주제로 사진을 찍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고향 브라질의 물도 부족한 10만㎡(3만여 평)의 땅에 나무를 심고 울창하게 가꿔 국립공원으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걸 보면서 꿈을 갖게 됐죠. 뜻이 맞는 예술가들과 함께 330만㎡(100만 평) 정도의 숲을 가꾸는 거예요. 그중 1%만 개발해서 건물을 짓고 100명 정도의 작가들이 상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대안예술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는 거죠. 작은 전시장과 공연장을 만들어서 일반인들이 찾아올 수도 있고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같은 질문을 한다. 330만㎡의 땅을 살 돈이 어디 있냐고. 이 작가의 대답은 이렇다.
“땅을 꼭 사서 소유를 해야만 하나요? 협회나 조합을 만들어 국유림을 빌려 숲을 가꾸고, 자연·사람·예술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면 되는 거죠. 앞으로 제가 더 노력해야겠지만, 꼭 10년 내에 이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인터뷰 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