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찾은 사람들
나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진가 이흥렬
이흥렬 사진가의 작품 속 나무는 우리에게 익숙한 나무와 다르다. 굵직한 기둥과 작은 잔가지도 힘 있게 뻗어나간 데서 기상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여타의 사진 속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흥렬 사진가는 공기처럼 늘 곁에 존재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무를 사진에 담아낸다.
10여 년 전 작업실이 양재천 근처였던 이흥렬 사진가는 어느 날 가로수마다 숫자가 적힌 빨간 리본이 붙은 것을 발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로를 넓히기 위해 일대의 나무550그루를 베어버릴 예정이라는 것. “공사 후 교통체증 완화 효과가 미미하다는 가상 실험 결과를 보고는 나무를 지키기 위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역 주민과 뜻을 모았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나무를 지키게 됐습니다.” 이후 그동안 양재천 나무를 촬영한 사진을 모아 그의 첫 나무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푸른 나무 시리즈’는 평소 좋아하는 색이자 그가 공부했던 이탈리아에서 ‘귀족’을 의미하는 ‘푸른 피’의 푸른색 조명을 나무에 비춰 촬영했다.
양재 시민의 숲 입구에 들어서자 이흥렬 사진가가 나무마다 설명을 덧붙인다. “저 작은 단풍나무는 아직도 많이 크지 않았네요. 그래도 가을이 되면 마치 여왕처럼 이 주변 나무 중 가장 화려한 색을 뽐내요. 이 나무는 제가 양재천 지키기 운동을 했을 때 촬영했던 나무예요. 원래 한 쌍의 나무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하나를 베어버렸어요.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나무는 플라타너스인데 버즘이 핀 것 같다고 해 버즘나무라 불린다. 손으로 나무를 쓸어내리며 나무를 느껴보라는 말에 덩달아 나무 기둥에 손을 얹었다.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주로 인물과 패션 사진을 찍었다. 그러던 중 평생 재미있게 집중할 만한 대상을 고심하게 됐다. “제가 그동안 찍은 사진을 쭉 살펴보니 유독 나무 사진이 많더라고요. 시골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또 가치 있는 것을 찍고 싶다 생각하니 ‘생명’이 떠올랐고, 결국 해답은 자연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대표하는 나무를 찍어야겠다 다짐했어요.”
그는 양재천 나무 사진전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 각지는 물론 네팔, 이탈리아, 마다가스카르 등 해외를 오가며 오래된 나무, 특별한 나무를 찾아다녔다. 사진을 촬영하는 입장에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무를 담는다는 게 어렵지 않은 지 물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고, 오랜 세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무를 촬영하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도 합니다. 나무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소통하려고 노력해요. 촬영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주변이 깜깜해지는 밤까지 나무 곁에 머물며 말도 걸고, 소풍 온 것처럼 와인도 마시면서 편안하게 관찰하다 보면 어렴풋이 나무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어요.”
이흥렬 사진가의 작품은 대부분 밤에 촬영한 것들이다. 별이 콕콕 박힌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린왕자가 찾아올 듯한 바오밥나무, 노란 배경 속 푸른빛을 받은 제주 팽나무 등 밤에 색조명을 쏘고 촬영한다.
“나무가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듯 지구의 주인공이기도 한 나무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어 이런 방식을 택했습니다. 촬영 전에는 동네를 둘러보고, 지역 주민에게 이야기도 들으며 나무가 자란 땅의 의미와 역사를 조사해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을의 구심점이던 팽나무가 마을이 불탄 이후 지금은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담고, 통영의 보호수와 당산나무처럼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온 나무를 담아내는 식이다. 여태 촬영한 나무는 셀 수 없지만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그는 가장 최근에 촬영한 전남 신안의 ‘우실(방풍림의 전남 방언)’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숲이었는데요. 꽤나 넓어서 촬영하기 어려웠지만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면서 긴 시간 동안 사람과 함께 조화롭게 그 땅을 지켜온 나무라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국내 1,500여 개의 섬을 돌며 보호수 또는 신성시되는 당산나무 등을 기록해온 그는 앞으로도 국내 지역과 섬은 물론 특히 남예멘에서만 자라는, 빨간 수액이 나와서 ‘용혈수’라는 이름이 붙은 특이한 나무를 촬영해보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이흥렬 사진가는 단순한 피사체를 넘어 나무가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 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나무들은 모두 서사를 품고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 곁의 나무에게도 역사와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이지윤 기자
THE WISE CARD (May -June 2022)